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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견딘 비석엔 절절한 한글 "아부지"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떠난다는 건 뿌리를 들추어내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역만리 땅에서도 뿌리를 채 내리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다.   11일 오전 10시, 하와이 열도 최남단 빅아일랜드 섬의 서쪽 홀루알로아 지역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코나 커피를 생산하는 농장이 즐비해 ‘코나 커피 벨트’로도 불리는 곳이다.   커피 농장들을 가르는 180번 도로를 지나는 중이다. 동행한 김교문 목사(전 코나한인선교교회)가 잠시 차를 세우라고 했다. 한 커피 농장 옆으로 길인지 아닌지 모를 협소한 샛길이 보인다.   저 멀리 대나무 수풀이 우거져 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된 듯한 그 길을 김 목사를 따라 150피트 정도 걸어 들어갔다. 대숲이 햇살을 가려버린 어둑한 그곳에서 이끼 가득한 묘비들이 두서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 목사가 나뭇가지를 들어 그중 묘비 하나를 가리키며 한자를 읽어내려갔다.   '고 조승운 묘' '조선 경북 고령군 출생'   1875년생인 조씨는 58세(1933년 4월 22일)에 사망했다. 하와이에 도착한 날은 1904년 6월 25일이다.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일전쟁이 벌어졌던 시기였다. 유추하면 조씨는 난세 가운데 스물아홉 살에 고향 땅을 떠났다. 가족도 없었다. 이곳 커피 농장 어딘가에서 수십 년간 노동자로 일하다 묘비 하나만 남겼다.   김 목사는 “묘비 없는 돌무덤까지 합하면 한인 초기 이민자 20여명이 이곳에 묻혀 있다”며 “당시 유교 문화에서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을 떠난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에 묻힌 것”이라고 말했다.   습기 가득한 이곳엔 수십 년의 세월까지 젖어있다. 무성한 수풀은 묘소가 오랜 시간 방치돼 있었음을 방증한다.   이끼와 낙엽 사이로 묘비에 새겨진 망자들의 신상을 살펴봤다. 황해도 수안군, 부산 연제구, 경성 애오개(서울 아현동), 경남 동래군 등 곳곳에서 왔다. 대부분 20~30대 젊은 나이에 나고 자란 곳을 떠난 이들이다.   하와이역사재단(HHF)에 따르면 이곳은 1917년 홀루알로아 지역 한인협회가 한인 노동자를 매장하기 위한 묘지 터로 매입한 부지다. 여기에 묻힌 이들도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하와이 주정부는 물론이고 한국 정부조차 이 땅을 돌보지 않고 있다.     하와이이민연구소 이덕희 소장은 “죽으면 묻힐 곳이 없던 한인 노동자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묫자리 명목으로 이 땅을 샀다”며 “이곳에 처음 묻힌 사람은 1922년, 55세 나이로 죽은 경북 안동 출신의 윤계상이란 인물인데 남아있는 이들이 장례를 치르고 묘비도 세워준 것”이라고 말했다.   남쪽으로 불과 0.2마일 떨어진 곳에는 ‘코나 이민 센터(Kona Imin Center)’가 있다. 1900년대 초반 이민자들의 관문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한인들은 도착하자마자 이곳에서 신상 확인 절차를 거친 뒤 각 농장에 배치됐다. 지금은 주민 회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민(移民)’이란 한자 명칭을 아직도 영문 발음 그대로 사용 중이다.   김 목사는 “당시 1500명 정도가 이곳에 왔는데 빅아일랜드는 하와이 열도에서 가장 많은 한인 노동자가 일했던 섬”이라며 “유입 규모를 고려하면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한인들의 무덤이 많을 것”이라고 전했다.   코나 이민 센터에서 북쪽으로 60여 마일 떨어진 카파우 지역으로 차를 몰았다. 낡은 사진 한장이 흔적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노스 코할라 시빅센터의 벽면 앞이다. 아이들을 무릎에 앉힌 한복 입은 아낙네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흑백 사진 밑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Korean Immigration Family-1905'   한인들이 하와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건 1903년 1월 13일이었다. 하와이이민연구소가 선박부에 기록된 이민자 명단을 조사한 결과, 한인 이민이 일시 중단된 1905년 11월까지 총 64회에 걸쳐 한인 이민단을 실은 배가 하와이를 오갔다. 사진 속 아낙네들은 그들 중 하나일 터다.   한인 초기 이민자들은 맨 처음 오아후 섬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중 커피 농장과 계약한 이들은 또다시 배를 타고 빅아일랜드 힐로 지역의 항구로 들어왔다.   빅아일랜드 초기 이민자들의 발자취를 역으로 좇았다. 홀루알로아 지역에서 동쪽으로 80여 마일 떨어진 힐로로 향했다. 자동차로 한참을 달려 알라에 공동묘지에 이르렀다. ‘코리안 섹션(Korean Section)’ 표지판이 한인 묘역임을 알린다. 이곳엔 150여 명의 한인 초기 이민자가 묻혀있다.   50년째 힐로에서 의사로 활동 중인 박훈 박사(84·힐로한인기독교회)는 “힐로의 한인들은 1980년대까지 힘을 모아 곳곳에 묻혀있던 초기 이민자를 이곳으로 한 명씩 이장했다”며 “이제는 후손들도 대부분 본토로 떠나 없기 때문에 묘비 관리가 거의 안 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화강암으로 된 거무스름한 한 비석에 절절한 한글 단어 하나가 눈에 띈다.   '아부지'.    한인 초기 이민자 박춘하(1880~1956·인천 영종도) 씨의 묘다. 선박부 기록에 따르면 박씨는 스물다섯 살인 1905년에 힐로에 왔다.   주민 마틴 김씨는 “방치된 역사를 보존하고 기록해야 하는 건 후세의 몫”이라며 “이민자의 삶을 정리한 역사 웹사이트나 사이버 추모관이라도 생긴다면 한인 이민사의 기록이 끊기지 않고 여러 세대에 걸쳐 계속 적립될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비명(碑銘)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있다. 듣고 싶어도 더는 들을 수 없다. 그들이 채 못다 한 이야기는 자취로만 남아있다.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곧 사라질 흔적들이다.   관련기사 묻힐 땅도 없던 그들, 묘비는 삶의 기록이었다 빅아일랜드=장열 기자·사진 김상진 기자 jang.yeol@koreadaily.com하와이 한인 노동자들 하와이이민연구소 이덕희 지역 한인협회

2023-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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